일 잘하는 기획자는 ‘왜’에 집착합니다
요즘 어딜 가나 ‘AI’ 이야기뿐이죠. 너도나도 생성 AI 기능을 붙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얼마 전 만났던 다른 회사 기획자 친구도 한숨을 쉬더라고요. 위에서 ‘우리도 AI 기능 넣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와서, 부랴부랴 ‘AI 챗봇’ 기획안을 쓰고 있다고요.
“그래서 그 챗봇을 왜 한다는데?”라고 제가 물었더니, 친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답했습니다. “글쎄… 일단 요즘 대세니까… 다들 하잖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나요? ‘경쟁사가 하니까’, ‘요즘 유행이니까’, ‘위에서 시켰으니까’ 같은 이유들로 시작되는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정말 많습니다. 이런 프로젝트의 기획자는 누구보다 바쁘죠. 기능 명세를 빼곡히 채우고, 수많은 예외 케이스를 처리하고, 복잡한 정책을 정의하느라 매일 야근을 하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게, 과연 일을 잘하는 걸까요?
‘열심히 하는 기획’과 ‘잘하는 기획’은 다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떻게(How)’만 생각하는 기획자는 일을 열심히 하는 기획자이지, 잘하는 기획자는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니어 시절을 돌이켜보면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기획 업무를 받으면 일단 신나서 화면부터 그렸죠. ‘이 버튼은 여기에 넣고, 문구는 이걸로 하고, 사용자는 이런 순서로 누르게 해야지!’ 이런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하는 건 정말 재미있거든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바로바로 나오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수많은 프로젝트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우리가 밤새워 만든 기능이 유저들에게 외면받거나, 심지어 비즈니스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의 대부분은 ‘어떻게’를 잘못 고민해서가 아니었어요. 시작부터 ‘왜(Why)’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죠.
CB 인사이트(CB Insights)에서 스타트업 실패 원인을 분석한 유명한 자료가 있는데요, 여기서 압도적인 1위(38%)가 바로 ‘시장이 원하지 않는 제품(No Market Need)’이었습니다. 정말 뼈아픈 결과 아닌가요? 수많은 사람들이 땀과 노력을 쏟아부어 만든 제품이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사라진다는 거니까요.

출처: The Top 12 Reasons Startups Fail (CB Insights)
이게 바로 ‘왜’가 없는 기획이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왜’에서 시작하는 기획은 무엇이 다를까요?
가상의 상황을 통해 ‘어떻게’로 시작하는 기획과 ‘왜’로 시작하는 기획이 어떻게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지 한번 살펴볼게요.
상황: 대표님이 “우리도 유저 락인(Lock-in)을 위해 ‘고객 등급제’를 도입해 봅시다!”라고 제안했습니다.
1) 열심히 하는 기획자의 접근법
주니어 기획자: (업무를 받자마자) “네, 알겠습니다! 고객 등급제 기획안 준비하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와서)
등급은 몇 개로 나누지? 브론즈, 실버, 골드… VIP까지 4개면 되려나?
등급별로 어떤 혜택을 줘야 할까? 할인쿠폰? 적립률 상향?
승급 기준은 어떻게 하지? 최근 3개월 결제 금액? 누적 결제 금액?
… 아, 생각보다 복잡하네. 개발할 것도 엄청 많겠다. 일단 경쟁사들은 어떻게 했나 다 뜯어보자.
‘어떻게’ 기획자는 곧바로 등급제의 구현 방법에 집중합니다. 경쟁사를 리서치하고, 복잡한 정책을 정의하고, 수십 장짜리 기획서를 작성하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종종 이런 문제에 부딪힙니다.
개발팀: “이거 정책이 너무 복잡해서 개발에 3개월은 걸릴 것 같아요.”
운영팀: “등급별로 쿠폰을 다 다르게 지급하고 혜택을 높이면 저희 운영 부담이 너무 커져요.”
사용자: (출시 후) “혜택이 별로라 굳이 등급 올리고 싶은 마음이 안 드네요.”
결국 엄청난 리소스를 쏟아부었지만,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물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2) 잘하는 기획자의 접근법
시니어 기획자: (업무를 받자마자) “대표님, 좋은 아이디어네요! 혹시 ‘고객 등급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대표: “음… 요즘 신규 유저는 많은데, 한번 구매하고 다시 안 오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단골을 좀 만들어야죠.”
시니어 기획자: “아, ‘첫 구매 고객의 재구매율 하락’이 핵심 문제군요! 알겠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한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왜’ 기획자는 고객 등급제라는 ‘How(방법)’가 아니라 첫 구매 고객의 재구매율 하락이라는 ‘Why(문제)’에 집중합니다. 이제 그의 머릿속은 완전히 다른 생각으로 채워집니다.
진짜 첫 구매 고객의 재구매율이 낮은 게 맞나? 데이터를 확인해 보자.
낮다면 왜 낮을까? 혹시 첫 구매 경험이 별로인가? 아니면 우리 제품을 다시 사야 할 이유를 잊어버리는 걸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꼭 ‘고객 등급제’뿐일까?
첫 구매 고객에게만 특별한 혜택을 주는 건 어떨까?
구매 후 2주 뒤에 제품 활용법을 알려주는 메시지를 보내는 건?
차라리 복잡한 등급제보다 아주 심플한 포인트 제도는?
‘왜’에서 출발하니, 해결책의 폭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이 기획자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실제 첫 구매 고객 몇 명과 짧은 인터뷰를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3개월짜리 복잡한 등급제 시스템 개발보다 훨씬 적은 리소스로, 더 큰 임팩트를 낼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낼 겁니다.
능력 있는 기획자가 되기 위해, 이제 ‘왜’를 찾아봅시다
이처럼 ‘왜’를 파고드는 습관은 기획의 질을 극적으로 바꿉니다. 당신을 그저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진짜 기획자’로 만들어주죠.
그렇다면 이 중요한 ‘왜’는 도대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거창한 방법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당신의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죠.
데이터 속에서 ‘왜’ 찾기: 유저들이 어떤 페이지에서 가장 많이 이탈하나요? 왜 그럴까요? 가장 사랑받는 기능은 무엇이고, 왜 그럴까요? 데이터는 유저들이 남긴 수많은 ‘왜’에 대한 흔적입니다.
동료에게서 ‘왜’ 찾기: 개발자, 디자이너, 마케터, 특히 고객과 가장 가까이 있는 CS(고객 서비스)팀 동료와 커피 한잔 마시며 물어보세요. “요즘 고객분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게 뭐예요?” 아마 당신이 미처 몰랐던 문제의 실마리를 잔뜩 얻게 될 거예요.
사용자에게서 ‘왜’ 찾기: 결국 모든 답은 사용자에게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실제 사용자를 직접 만나거나, 하다못해 주변 친구나 가족이라도 붙잡고 우리가 만든 서비스를 써보게 하세요. 그리고 물어보세요. “이거 왜 안 쓰세요?”, “이 부분은 왜 누르신 거예요?”
기획서를 펼쳐놓고 혼자 끙끙 앓는 시간을 조금만 줄여보세요. 대신 그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데이터를 보고, 동료와 대화하고, 사용자를 관찰해 보세요. ‘어떻게’에 대한 답은 책상 위에 없지만, ‘왜’에 대한 힌트는 반드시 현장에 있습니다.
당신의 다음 기획을 위하여
이 글을 읽고 ‘아, 나도 이제 왜를 고민해 봐야지!’라고 생각하셨다면, 절반은 성공입니다. 그런 당신을 위해 지금 당장 실천해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지금 맡은 프로젝트에 ‘5 Whys’ 적용해 보기: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기획안을 한 눈에 보면서, 항목마다 “이걸 왜 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섯 번만 던져보세요. 아마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수준의 근본적인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CS팀 동료와 30분 커피챗 잡기: 이번 주 안에 시간을 내서 고객 문의를 가장 많이 받는 동료와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제가 기획에 참고하고 싶은데, 요즘 이 기능에 대한 고객분들 반응은 어때요?”라고 가볍게 시작해 보세요. 예상치 못한 보물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왜’를 묻는 것은 때로 귀찮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습관 하나가 당신의 성장에 엄청난 터보 엔진을 달아줄 거라 확신합니다. ‘열심히’를 넘어, 진짜 ‘잘하는’ 기획자로 거듭날 당신의 내일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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