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제품 기획이 곧 가성비다
2025. 8. 18.
0. 비싼 기획자 뽑기 아깝다고요? 당신의 제품을 살리는 가장 '가성비' 좋은 투자입니다
야심차게 시작했던 신규 서비스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사용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주겠다며 팀원 모두 밤낮없이 달렸죠. 디자이너는 한 땀 한 땀 영혼을 갈아 넣은 UI를 뽑아냈고, 개발자들은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로 밤을 새우며 코드를 쌓아 올렸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드디어 오픈을 코앞에 둔 어느 날. 뒤늦게 참여한 외부 전문가의 한 마디에 회의실 공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능, 사용자들이 정말 쓸까요? 핵심 타겟이 생각하는 맥락과 너무 다른데요?”
그 한 마디가 트리거였습니다. 다시 보니 서비스의 핵심 로직부터 사용자 흐름까지, 곳곳에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희는 오픈 일정을 전면 백지화하고, 거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몇 달간의 노력과 비용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죠.
아마 제품을 만들어 본 분들이라면, 크고 작게 비슷한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왜 이런 비극은 반복되는 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값비싼 실패를 막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제품 개발의 효율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하지만 많은 리더가 간과하는 ‘가성비’ 좋은 투자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바로 ‘제대로 된 기획’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1. 오류는 빨리 발견할수록 100배 싸게 먹힙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소프트웨어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발견 시점이 늦어질수록 수정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마치 집을 짓는 것과 같죠. 설계도에 잘못 그어진 선 하나를 지우는 건 순식간이지만, 이미 쌓아 올린 벽을 허물고 다시 짓는 건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대공사입니다.
전설적인 컴퓨터 과학자 Boehm의 연구는 이 사실을 수치로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요구사항 정의나 기획 단계에서 발견된 오류를 수정하는 비용을 1이라고 할 때, 개발이 끝난 테스트 단계에서는 15~40배, 제품이 출시된 후에는 무려 100배 이상의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해요. (출처: Boehm, B. and Basili, V. "Software Defect Reduction Top 10 List," Computer, 2001)

구체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상황이죠. 현업에 있는 모두에게 친숙한 상황일 거예요.
[상황 1: 기획 단계에서 오류 발견]
기획자: “아, 로그인 방식을 소셜 로그인만 넣기로 했는데, 저희 핵심 타겟이신 4050 대표님들은 이메일 로그인을 더 선호하실 수 있겠네요. 이메일 로그인 옵션을 추가하는 게 어떨까요?”
디자이너: “그럼 화면에 버튼 하나 추가한 버전으로 프로토타입 수정해 볼게요.”
수정 비용: 단 몇 분.
[상황 2: 제품 출시 후 오류 발견]
CS팀: “대표님, 고객센터에 ‘왜 이메일로 가입이 안 되냐’는 문의가 있어요. 가입 단계에서 이탈하는 고객이 너무 많아요.”
대표: “그래요? 이메일 로그인 기능 추가해주세요.”
개발자: "…그거 하려면 DB 설계부터 다시 봐야 하고, 인증 로직도 새로 짜야 합니다. 테스트까지 하려면 최소 2주는 걸릴 작업입니다."
수정 비용: 개발자 N명의 2주치 인건비 + 늘어나는 고객 불만 + 기회비용 손실
결국, 기획 단계에서의 5분짜리 대화가 수천만 원의 비용과 잠재 고객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기획은 단순히 문서를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미래에 발생할 엄청난 비용을 미리 막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리스크 관리 활동인 셈이죠.
2. 하지만… 개발자는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 기획이 중요한 것 누가 몰라. 그럼 완벽한 기획서가 나올 때까지 몇 달이고 기다려?”
물론 그럴 순 없습니다. 기획의 완성도를 높인답시고 시간을 무한정 끌다 보면, 정작 제품을 만들어야 할 개발자들은 속절없이 대기해야 하죠. 개발자들은 일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코드로 제품이 만들어지고 세상에 나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죠. 그런데 기획이 계속 감감무소식이면 어떨까요?
개발자 A: “C기획자님, 지난주에 주신다던 로그인 상세 기획서는 언제쯤 나올까요?”
기획자 C: “아, 그게요… 생각해보니 예외 케이스가 너무 많아서요. 조금만 더 다듬고 공유 드릴게요.”
(그리고 일주일 후…)
개발자 A: (동료에게) “하… 또 검토 중이래. 그냥 토이 프로젝트나 해야겠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팀의 사기는 떨어지고, 개발 속도는 더뎌지죠. 더 중요한 건 월급이 월급대로 나간다는 겁니다. ‘완벽한 기획’이라는 허상에 집착하다가 더 큰 비용(시간, 인건비, 팀 모멘텀)을 낭비하게 되는 거죠.
게다가 기획의 허점은 머리로만 생각할 때는 보이지 않다가, 막상 개발을 시작해야 비로소 드러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최근 IT 업계에서 ‘애자일(Agile)’ 방법론이 대세가 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죠. 일단 최소한의 기능(MVP)이라도 빨리 만들어보고, 부딪혀보고, 사용자의 피드백을 받으며 기획을 더 탄탄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이 결국 더 효율적이라는 걸 모두가 깨닫게 된 겁니다.
결국 기획이란, ‘완벽함’을 추구하는 동시에 ‘속도’를 맞춰야 하는, 아주 어려운 줄타기인 셈입니다.
3. 그래서, ‘좋은 기획자’를 뽑는 것이 가장 쌉니다
앞선 두 가지 딜레마를 다시 정리해볼까요?
기획이 부실하면 개발 단계에서 엄청난 비용이 발생한다. (오류는 빨리 잡아야 싸다)
기획이 너무 오래 걸리면 개발팀이 멈춰서고,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개발자는 일하고 싶다)
이 어려운 줄타기를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이 바로 ‘실력 있는 기획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획자를 채용하는 것이야말로, 제품 개발 전체 과정에서 가장 ‘가성비’ 좋은 투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대표님이 값비싼 개발자, 실력 있는 디자이너를 모셔오는 데는 많은 돈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기획자의 채용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죠. 대표가 직접 기획을 하거나, 신입 기획자에게 맡기거나, 심지어는 개발자에게 ‘알아서 잘 만들어 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자동차의 심장인 엔진에는 수천만 원을 쓰면서,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은 가장 값싼 모델을 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성능 좋은 엔진과 멋진 디자인을 가졌어도, 엉뚱한 목적지로 가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4. 좋은 기획자는 단순히 요구사항을 정리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짜 문제’를 파고드는 질문을 던집니다: “대표님, 왜 이 기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이 기능을 통해 고객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나요?”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언어를 통역합니다: 대표의 비전과 고객의 니즈를 개발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고, 개발의 제약을 대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리스크를 찾아냅니다: 법률, 정책, 데이터, 운영 등 개발 외적인 문제까지 고려하여 나중에 터질 ‘시한폭탄’을 미리 제거합니다.
명확한 우선순위를 설정합니다: 수많은 요구사항 속에서 비즈니스 임팩트와 개발 리소스를 고려하여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결정합니다.
가령, 5명의 개발팀(월 인건비 4,000만 원 가정)이 잘못된 기획으로 1개월을 허비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손실은 최소 4,000만 원입니다. 하지만 월급이 500만 원 더 높은 시니어 기획자가 이런 실수를 단 한 번만 막아줘도, 회사는 이미 3,500만 원을 번 셈입니다. 제품 개발이 계속되는 한, 좋은 기획자는 이런 방식으로 수억 원의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5. 마무리하며: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뛰어난 기획자를 채용하는 것은 물론 최고의 방법이지만, 그만큼 어렵고 시간이 걸립니다. 채용과 동시에, 혹은 그 이전에 시도해볼 수 있는 3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기획'을 측정 가능한 업무로 만들기: '기획은 원래 애매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개발팀이 기획과 관련하여 질문하는 횟수', '기획 변경으로 인한 스토리포인트 재산정 규모' 등을 측정해보세요. 이 지표가 높다면, 우리 회사의 기획 프로세스에 문제가 있다는 명확한 신호입니다.
기획에 기술을 투자하기: 개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도구를 도입하는 것처럼, 기획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도 기술 투자가 필요합니다. 팀원들의 아이디어를 자동으로 구조화해주거나, 파편화된 기획 문서를 통합 관리하고, 외부 툴과 연동하여 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솔루션 도입을 검토해볼 수 있습니다.
'실패 회고'가 아닌 '기획 회고' 도입하기: 프로젝트가 실패한 뒤에 원인을 분석하는 것은 너무 늦습니다. 프로젝트 '시작 단계'에서 기획안을 두고 개발팀, 디자인팀이 모두 모여 "이 기획의 허점은 무엇인가?", "가장 우려되는 점은 무엇인가?"를 리뷰하는 '기획 회고'를 문화로 정착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회사가 만약 다음 분기 R&D 예산을 고민하고 있다면 이 질문을 던져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개발팀의 속도를 높이는 데 투자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방향키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 투자하고 있는가?"
최고의 '가성비'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첫 단계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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